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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 회원들을 위한 자유게시판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518의 고통을 안고 사는 김동관 (정외77) 선배님의 가족을 만나고 왔습니다.

작성일
2016.10.05
첨부파일
지난 7월 5일 부천에 있는 김동관(정외77) 선배님의 부인인 이지원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김동관 선배님은 1980년 5월 20일 오전 7시 제3공수여단의 일원으로 전남대에 투입돼 진압작전에 참여하였으며 광주이후 지금까지 35년 동안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수도권에 있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악몽같은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2009년 12월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광주 진압군중 처음으로 국가유공자가 되신 분입니다.

선배님은 입학이후 유신독재정권 시절, 암울한 시대상황속에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과 접하게 되어 고전연구회 써클활동을 하였으나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었던 선배님은 학내 상주한 사복경찰들과 첩자노릇을 하라는 꼬드김등이 싫어 1979년 5월 군입대를 하게 됩니다. 써클활동으로 운동권 경력이 있어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되 특전사령부 제3공수여단으로 배속을 받아 이듬해인 1980년 5월 20일에 광주민중항쟁의 진압군으로 전남대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선배님의 인생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음을 그때는 알 수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시민군을 진압하는 제3공수여단의 일원이었지만 선배님은 시민군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으며 유독 악랄하게 시민군을 살해한 하사관들에 대한 적개심을 달래지 못하고 병영내에서 이들 하사관과 격투극을 벌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광주시민과 대학생들의 죽음에 대해 상관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살인적인 구타도 당하였습니다.

"명령은 데모대 중에서 무장한 경우에만 사격을 하게 돼 있었어. (그런데) 얘들 특전사 요원 애들은 무차별 사격했다고, 무차별로. 내가 그걸 봤어. 무차별 사격을...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 버렸어. 무장을 했건 안했건. 도망가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걸 쏴 죽였어. 이 특전사 애들이. 그러니, 무차별 학살이지 무차별 학살...
나는 광주 시민을 쏘는 특전사를 쏴 죽일라 그랬단 말이야. 근데 그걸 차마 죽이진 못하고...
전남대에서 광주 교도소로 이동했을 때 일이야. (시위대가) 탈취해 온 버스가 있었는데 문이 안열려서 문을 억지로 빵 쳐서 열었더니, 운전수가 총을 맞았는데 의자가 뒤로 딱 제껴져 있었어. 운전수가 딱 누워있는데 살아있었어. 그런데 눈에 총알을 맞았어 눈에... 심장은 뛰더라고, 만져 보니까.
버스 앞에는 전부 총알 구멍이야. 총알이 눈에 맞았는데 심장은 살아있고. 그때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
그걸 어디 묻을 수도 없고, 살아있으니까. (그때만 해도) 암매장한 게 많아, 시신 암매장 한 게...묻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 그래서 운전수를 나무 밑에다가, 그 전남대 산 나무 밑에다가 들어다가 놓고 왔다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치료해 줄 수는 없고...그후 이동했는, 그 때 참 처참하더라고.
그 때 전두환이를 죽여야 되고 노태우도 죽여야 되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매일 생각하면 술이 안 끊어지는 거야 술이. 슬퍼서... 복수를 해야겠다고 불타는 게 아니라 슬퍼서. 그게 슬퍼서 그들의 죽음이 슬퍼서..."

곱게만 커온 선배님이 광주이후 부대에 복귀했지만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총부리를 겨눈 하사관들과의 잦은 충돌, 상관들의 살인적인 구타와 집단적인 따돌림, 탈영보고와 자살기도 등··· 고귀한 영혼과 여린 가슴을 지닌 김동관 선배님에게 광주의 참상과 지옥같은 병영생활은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자책감과 분노감을 이기지 못하다 선배님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선배님은 제대후 82년 봄 복학을 하였으니 이듬해부터 휴학, 정신병원과 복학 등을 거듭한 끝에 85년 가을 가까스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그가 입원한 병원만 경희의료원, 강남 성모병원, 고대 병원, 용인정신 병원 등 즐비하였는데 정신병에 대한 일반의 냉소적인 인식들이 겹쳐 초기 치료에 실패하였고 평소 간경화병을 앓으시던 부친께서는 금지옥엽처럼 키운 아들이 몹쓸 병을 얻어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고는 1983년 12월 홧병으로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선배님은 아버님의 죽음에,
“나 때문에 그렇게 되셨으니까 그게 죄송해서 마치 옛날 3년상 치르듯이 3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시면서 괴로움을 달랬다.”고 하십니다.

선배님에게도 잠시 행복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1991년 결혼을 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만나 주위의 도움으로 인연을 맺어 신접 살림을 신림동엔가 차렸는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모처럼만에 찾은 정신적 육체적 평온의 시절은 그러나 1993년 아들의 출생 직후 음성정신병원에 장기간 입원함으로써 마감하게 됩니다. 신혼생활중에도 반포에 있는 용인정신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광주에서 시민군을 죽였다라는 환청과 음주, 폭언과 폭행 등이 잇따르면서 상태가 심각해졌기에, 2002년 2월 선배님은 합의이혼을 합니다.
“아들과 아내에게 짐이 되지 않아 홀가분하다.”면서 서로를 위해 잘한 선택이었다고 그렇게 지금 김동관 선배님은 혼자 동두천에 살고 있으며 이지원님은 아들과 함께 부천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김동관 선배님의 명예회복과 군복무중 공상을 입은 군인으로 국가의 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법적인 해결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정외과 77 동기인 황남준 선배님과 전성 선배님이 10년에 걸쳐 준비하고 재판하고 많이 애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배님은 2009년 12월 11일, 대법원 확정판결에 따라 광주 진압군중 첫 국가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지금 대학3학년인데 올 3월부터 경찰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민동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경찰공무원 시험교재를 사고 인강을 신청해서 공부를 한다면서 우리가 보내는 유가족 장학금이 적지만 소중하게 도움이 되고 있어서 회원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국가유공자가 되어서 나오는 보상금은 김동관 선배님이 혼자 생활하고 병원 치료하는데 쓰이고 있으며 이지원님은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경민군과 함께 생계를 책임지고 계시는데 많이 힘들고 어려워보이십니다...

저는 민동에서 일하면서 김동관 선배님이 투병중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억울하고 악몽같은 삶을 지내고 계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지원님만 만났는데 나중에 정외과 77 선배님들이 김동관 선배님을 만나러 가게 될 때 민동에서도 같이 가야겠습니다. 그때까지 선배님의 몸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광주시민, 민주열사 등 승자의 시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이 조명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공수부대원이 광주 진압후 얼마나 악몽같은 삶을 살아왔는가를 통해 광주항쟁의 본질을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정통성 없는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 그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입니다.
역사의 진보란 절대 권력 스스로 내주지 않으며 시민들이 쟁취해야 하는 것,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
이제 우리 사회가 광주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들의 고통에 답을 해야할 것입니다